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졌다.
30일 별세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과 정치개혁에 앞장서며 재야운동과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민주화운동 시절 10여년 간 수배생활을 할 정도로 재야 운동권의 리더로 통했고, 제도정치권 입문 후에는
두 차례 대선후보 경선에서 중도하차하는 자기희생적 모습을 보였다.
재야운동권에서 김 고문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통한다. 그는 1965년 대학 입 학 후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때 총ㆍ대 선 부정선거 항의집회를 하다 제적당해 군대에 강제징집됐다. 그는 1970년 복학했지만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됐다. 이때부터 1979년 10ㆍ26 사태 때까지 도피생활을 하면서
`공소의 김근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김 고문은 1983년 첫 공개적 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1985년 투옥될 때까지 두 차례 의장을 맡았다.
그는 이 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보름 가까이 "스스로 죽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여덟차례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을 받았다.
이 고문 후유증이 파킨슨병으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다.
당시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두꺼비가 뱀에 잡히면 죽지만 그 뱀도 두꺼 비 독에 쏘여 죽고 이후 두꺼비 새끼들이 그 속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새롭게 성장하듯 자신에 대한 탄압을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희생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1987년 악몽같은 고문 경험을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미국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씨와
공동 수상했다. 김 고문은 자신을 고문 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에게도 역사적 용서를 했다. 김 고문은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하다 또다시 구속돼 1992년까지 투옥생활을 했다.
김 고문은 1994년 제도권정치로 눈을 돌렸다. 그는 민주자유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는 민주연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출범한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또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잡고 본격적인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10월 에드워드 케네디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 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해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2004년 17대 총선까지 내리 3선 배지를 달았다.
반면 그는 동교동계 등 구여권 주류세력에 밀려 `재야의 리더'라는 무게에 걸맞는 당직을 맡지 못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하며 중도에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이후 정동영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의 양대 계파 수장으로 자리 매김했다. 재야 및 486운동권 출신의원들을 중심으로 `GT계'라는 세를 형성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입각 경험을 쌓았고,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스스로 독배를 들겠다"며 당의장을
맡아 당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참여정부 후반기로 갈수록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해지면서 열린우리당을 되살리기에는 버거웠다.
2007년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때 그는 또다시 기득권을 버렸다. 범여권 대통합과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
실현이라는 대의를 위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김 고문은 2008년 18대 총선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원외에서 민주진보 대연합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내년 총ㆍ 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승리하려면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등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反)보수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고문은 지난달말 건강이 악화해 끝내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한 측근은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민주진보 대연합을
이루겠다는 의지까지 밝혔다"고 전했다. 그는 입원 치료 중인 지난 8일 딸의 이틀 후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자 억측을
피하기 위해 파킨슨병 투병사실까지 공개하며 재활 의지를 다졌지만 결국 합병증이 겹쳐 세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날 가족과
민주통합당의 이인영 최고 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떠벌리며 한 얘기가 있다. 선명성 강한 야당만 밀어주면 뭐하냐? 먹고 살기 바쁜데... 구민들 위해서라도
뭔가 해야 하지 않는가....?
근태형은 조용했다. 뭔가 하려면,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편법으로, 지역 이기주의를 조장하고 획책해야
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었던 그다...마인드 정책은 뉴타운 한방에 넉다운됐다.
도봉갑 아줌마들은 김근태의 선명성과 진정성을 알고 있었지만 뉴타운이라는 광풍의 미끼에 스스로 재물이 되었다..
자식새끼들을 스스로 뉴라이트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일제잔파들의 미끼로 지 자식들을 골라 스스로 바쳤다...
치마바람을 일으키며 자식하나 바란다고 개지랄을 떨고 다니면서도 정작 망망대해에 아이들을 표류시켰다.
옆 동네에서는 노회찬을 이긴 홍정욱이 이미 국회의원 출마를 포기했다. 이거 오세훈같은 놈이다.
지도 해보니까...당선된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려니 할것이다. 상대가 노회찬이었던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김근태 상임고문의 운명소식을 들으면서 지난 18대 총선을 떠올려 본다.
우리 아이들에게 밝은 미래를 담보해주는 것은 우리 세대가 마지막으로 가진 이 사회에 대한 의무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이행하려고 하는 의지조차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무지다....!!!!!
서러운 무지다. 얘기하기도 벅찬 역사에 대한 유기다.
이 무지가 결국은 우리 아이들의 숨통을 조이고 결국은 세상을 배신하게 만들 것이며
스스로 패퇴하게끔 만드는 악습을 우전적으로 전이하게 만들 것이다.
이근안같은 놈을 가죽을 발가벗긴체 죽이지 못한 이 사회는 반드시 복수를 당하리라....